<완산실록>기록에는.

  `인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셨다. 그러나 인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경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하자, 황후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대극(奇大極)에게 들었는 데 우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완산리씨가 뒤를 잇는다고 하였습니다.”이 에 왕이 기대극을 불러다가 묻기를 “리씨가 왕이 될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기대극 이 대답하기를 “신이 기린산맥(麒麟山脈)을 살펴보니 반드시 왕이 일어날 곳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기대극이 말하기를 “옛 부터 제왕이 성을 바꾸어 계승함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옛 사람 김지원(金志元)이 그 무덤을 이장하려다가 도리어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어찌 무덤을 파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편목(編目)>이란 책에 `나무의 아들[李]이 양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다[魚羊]'고 하였는 데, 지금 그 중이 아직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나 신년(申年 : 壬申年, 1392) 이 멀지 않았으니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지사(地師)더러 기린산맥 을 살펴보고 오라 하니,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산맥을 살펴보니 자손들이 끊길 형국이라 별로 왕이 일어날 곳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어 “그렇다면 기대극의 흉칙한 말 은 어째서 생겼느냐?” 하고 두 사람을 불러 대질시키니, 기대극이 묻기를 “기린산이 어떤 좌향(坐向)인가?” 하자 지사가 대답하기를 “계좌정향(癸坐丁向)이오.”라고 하였다. 기대 극이 말하기를 “그 곳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용과 뱀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요, 천명이 반드시 영험할 것이요, 기린산은 금강산의 산맥이 뻗어 와 용과 물이 꼭 맞아 용이 구오 (九五 : 王位)에 펼쳐 있어 그것이 베푸는 은혜가 물고기[魚]나 양(羊)에까지 내리는 격이 요”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로하여 인(璘)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吉城 : 吉州) 으로 귀양 보내고, 군사 3백 명을 파견하여 무덤을 파내게 하였는데, 그 군인들이 모두 향린산 밑에서 벼락을 맞아 몰살했다. 이에 왕은 탄식하여 “하늘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는 할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중지했다.'

 부인 문씨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때 오랑캐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 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으로 경산(慶山)으로 이배(移配)되어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안남(安南)으로 이배 하라고 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인공의 이름을 정량(貞亮 : 定良)으로,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부국태(父國太) 또는 부국대부(富國大夫) 염우(?祐)로, 기대극(奇大極)이 기대승(奇大升)으로, 기린산(麒麟山)이 향린산(香麟山) 또는 향인산(香因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인(璘) 공의 휘를 인(隣)으로도 보느냐가 문제이다. 이 동음이자(同音異字)가 우리 선원선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원계보>에는 용부(勇夫) 공의 아드님으로 인(璘)과 거(?)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璘)을 인(隣)과 같이 볼 때는 준의(俊義)와 의방(義方) 두 형이 생기고, 매제[于學儒]가 더 늘어난다.

 <고려사> · <태조실록> · <씨족원류>에는 인(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璘)과 인(隣) 을 같은 분으로 보는 이유는 <선원계보>에 `인(璘)공은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요, 배위는 문극겸(文克謙)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고, <고려사> · <문극겸열전(文克謙列傳)>에 “문극겸은 미혼의 딸이 있었는데, 리의방(李義方 : ?∼1174)의 아우 리린(李隣)에게 시집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 <리의방열전(李義方列傳)>에 1174년(고려 명종 4) 1월에 중흥사(重興寺) 중 등 2천 명이 리의방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뒤, 리준의(李俊義)와 리의방이 싸우므로 정중부(鄭仲夫 : ?∼1178)가 말하기를 “형제가 궁중에서 싸우다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며 리준의를 살해하려 하는 등의 기록으로 리준의와 리의방이 한 형제임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또, <고려사> · <우학유열전(于學儒列傳)>에는 “정중부의 난을 꾸밀 때 우학유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성공한 후에 그를 죽이려 하니, 그는 겁이 나서 리의방의 누이에게 장가 가서 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준의 · 리의방 · 리린 · 우학유가 남매 지간이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기록은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을 비롯하여 타성의 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선원계보>에는 인(璘)공의 아우에 거(?)공만 아우로 기록되어 있으니 어째서 일까? <고려사> · <최균전(崔均傳)>에 이런 기사가 있다. “1174년(고려 명종 4) 9월에 서 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 리의방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때 화주(和州 : 永興)의 낭장(郞將) 리거(李?)가 성문을 열어 주어 정중부군이 퇴각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리거란 분이 과연 우리의 선조인 평장사공 일까? 동명이인일까? 시대가 비슷한 것은 수긍이 가는데, 형제간에 행동이 다르니 의아하게 느껴진다. 리준의가 마지막에 리의방을 죽이려 한 일화나, 리의방을 죽이려 쳐들어온 조위총의 편을 들어 리거가 리의방 에게 불리하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형제간의 의리상 부도덕한 것이다. 물론 형제간에도 뜻이 다르고 이해가 달라 해치려던 일은 동서고금에도 있는 일이나 준의 · 의방 · 인 · 거를 4형제로 볼 때 관계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으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리의방은 정중부난 때 제2인자로, 총참모로 그의 지략에 의하여 그 일이 성공된 것이다. 혁명이 성공한 뒤 1174년(고려 명종 4) 3월 기축일에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니 <고려사> <후비열전(后妃列傳)>에 “강종(康宗) 사평왕후(思平王后) 리씨는 의방의 딸로 강종이 태자였을 때 맞아들여 수령공주(壽寧公主)를 낳았는데 의방이 죽음을 당하자 쫓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리의방은 한때 제일의 권력자로 부원군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나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18일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보낸 중 종감(宗?)에게 피살되니 그 집안은 만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170년(고려 의종 24) 혁명을 일으킨지 4년만의 일이었다. 리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인 등 1백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이 지은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이 때 태자비는 임신 8개월이라 의종 임금이 보류해 두었었는데 두 달 후에 딸을 낳고 이듬해 3월에 폐출해 버렸다.

 그러니 인(璘)과 인(隣)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우리 선원선계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치욕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분을 별개의 인물로 볼 때는 우리의 <선원계보>대로 단순해지나, 이는 인(璘)공이 내시집주(內侍執奏) 벼슬이란 것과 문극겸의 딸을 아내로 맞으신 것이 똑같기 때문에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어렵다.

 내시집주란 왕명의 출납(出納)과 숙위(宿衛)의 임무를 띠고, 임금 곁에서 복무하는 조선조 때의 승정원내 관리같이 생각되는데, <고려사>에는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계해일에 리 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고려사> ·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 등의 기록대로 인(璘)과 인 (隣)이 같은 분이라 가정하면 용부(勇夫) 공의 자녀는 4남 1녀가 되고, 1174년(고려 명종 4) 에 준의 · 의방 · 인 세 분이 동시에 작고 한 것이 된다. 그러면 <선원계보>에서는 왜 준 의 · 의방을 제적했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려 시대이지만 나라의 역적으로 몰린 분들이라 족보에서 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174년부터 1392년까지는 218 년 간이다. 16세 인(璘)공부터 태조고황제까지는 6대의 기간이니, 30년을 1세로 치면 그럴 듯하게 맞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인(璘)공의 아들로 양무(陽茂)장군과 딸 유택(柳澤)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